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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Happily) Ever After

 열정적 사랑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사랑은 변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혹은 변한 사랑에 상처받았을 것이며,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통해 사랑은 지속되는 것임을, 단지 열정이 아니라 기술임을 말한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27p.)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한편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심리와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들을 넣는다. 특히 이 책의 주인공 라비와 커스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그들이 유년기에 겪은 환경으로 인한 그들의 심리 상태를 주목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라비는 바람 하나 들지 않는 꽉 닫힌 창문, 그로 인한 따뜻한 상태를 선호한다. 어릴 적 베이루트에서 살면서 전쟁의 공포를 겪은 탓이다. 반면 커스틴은 조금 춥더라도 창문을 활짝 열고 선선한 공기를 쐬는 것을 좋아한다. 두 사람은 이런 사소한 것으로 부딪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혼하면 컵 놓는 위치 같은 사소한 것들로도 싸운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우리의 삶의 양식이, 어릴 적의 경험이 군데군데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엔 아마 왜 상대방이 그렇게 행복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할지도.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라비가 6시 반을 얼마 안 남겨 오레가노에 갈 채비를 하자고 할 수도 있었고, 커스틴은 그들의 침실에 밀폐형 창문까지도 달았을지 모른다. (79p.)

 

 처음에는 상대방의 모든 걸 알고 싶고, 그에게 진짜 내가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는다는 느낌에 행복에 겹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고 그런 모습까지 모두 사랑 받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부분들에서 부딪히고, 상대방에게 상처 받고, 나로 인해 상처 입는 상대방을 보면서 그러한 낭만은 사그라든다. 이제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또다시 상대방이 사랑해줄 수 있는 나를 보여야 한다.

 

우리가 파트너로부터 두렵거나 충격적이거나 구역질 나는 말을 거의 듣지 않을 때가 바로 걱정을 시작해야 할 순간이다. 친절해서든 사랑을 잃을까 애절하게 두려워해서든 그런 말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파트너가 달콤한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상상을 은폐하고 있다는 가장 뚜렷한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희망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보에 귀를 닫아버렸고 그럼으로써 그 희망이 더욱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106p.)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상대방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신비롭게만 느껴진다. 때로는 상상의 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 여전히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는 그의 생활 패턴이나 그가 보이는 반응, 성격 같은 것들이 예상된다든가, 함께 꾸려 나가는 생활의 루틴 같은 것들을 알 때 - 상상의 여지는 적어지고 낭만의 특성인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사라진다. 이때 결혼 생활은 외도라는 구덩이를 만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알랭 드 보통은 참 선문답스러운 문장들을 적어놔서 나를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거 자칫하면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당당히 외치는 불륜남녀의 합리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들이려면 대개 파트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 만약 사랑을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라 정의한다면, 자주 시달리고 잔뜩 주눅이 든 남편에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가 거의 모르는 사람과 10분 동안 구강성교를 즐기고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결코 사랑이 아니라 속 좁고 위선적인 소유욕, 다시 말해 상대방의 행복에 자신의 행복이 포함되는 경우에만, 오직 그 경우에만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욕망에 불과하다.

 물론 이게 작가의 진짜 신념은 아니고, 이거 나쁜 짓이라고 끝에 못박긴 하지만 뭐 그랬다. 우리의 주인공 라비는 외도를 통한 다양한 감정적 격동을 겪은 끝에 결혼이라는 제도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이들의 존재였다. 아이들을 통해 작가는 사랑의 시작, 아이들만이 받을 수 있는 사랑, 어릴 적 우리 역시 받았던 그 사랑 때문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 마음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사랑에 대한 욕구, 그런 것을 잘 조명하고 있다.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 -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된다.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 - 문자 그대로 - 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147p.)
 아이는 어른에게 사랑의 다른 측면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한 행동 이면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부모는 울음, 발길질, 슬픔, 화가 진정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해야 한다. 이 해석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평범한 성인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해석 양상과 확연히 차별되는 점은 자애심이다. 부모는 아이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괴로워하고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단지 아이를 찌르고 있는 핀을 확인하고 제거해주면 아이는 즉시 타고난 천진함을 회복할 것이라고. 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심술궂거나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비난하지 않고,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한다. 아이가 깨물 때 우리는 아이가 틀림없이 겁을 먹었거나 순간적으로 골이 났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배고픔, 소화 장애, 수면 부족이 기분에 서서히 미칠 수 있는 영향도 잘 알아본다.
 만일 이 본능을 성인들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성인들의 관계에서도 심술궂음과 잔인함을 보아 넘기고 거의 항상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두려움, 혼란, 피로를 감지해낼 수 있다. 인류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150p.)

 아기들을 보면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풀어지고 무방비하게 웃어주게 될까. 아기의 미소를 보면 나도 덩달아 미소를 띠게 되고 어딘가 훈훈해지는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인가보다. 아기를 통해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억. 작가의 말처럼,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람 속의 아이를 찾아낼 수 있다면 모든 관계는 한결 더 둥글어질 것 같다. (실천이 안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긴 하지만) 가장 크게 배운 점.

 

사랑은 낭만과 열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잠깐의 시작과 지속되는 수십 년의 결혼 생활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통찰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은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이제 (평온한 날에는) 행복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불완전함과 상대의 불완전함을 찾고, 인정하고, 부딪히며 받아들이는 이 모든 과정이 사랑이다. 그 후로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Happily Ever After의 Happily는 희미하게 부서지더라도, Ever After는 남는다. 완벽하지 못한 두 개의 인생이, 수많은 불확실함 속에서 아주 가끔 반짝이는 행복을 함께 바라보며, 그렇게.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 불확실성을 의식하는 만큼 라비는 더욱 열렬히 이 햇살을 붙잡아두고 싶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모든 것이 명료하다. 그는 커스틴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고 인내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잠깐 동안 만족을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짧은 순간 - 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떄로 - 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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