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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책

경애의 마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들은 그 공백으로 서로 이어지는 걸까.

 상수. 부장대리라는 애매한 직급을 가진, 본인은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국회의원 출신인 아버지의 인맥 덕에 겨우 회사에 붙어 있는 인물. 그루밍에 관심이 많고 ‘일반적인 한국 남자’들의 생활에 잘 끼어들지 못하는, 그럴 때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으면 ‘군대 면제에요’를 모든 일의 해답인 양 내세우는 인물. 그는 ‘언니는 죄가 없다’는 페이지를 운영하며 수많은 여성들의 익명의 고민을 듣고 공감해주는 걸 가장 큰 보람으로 삼는다.

 경애. 파업을 주도했다고 해 회사에 미운털이 박혔으나 엄마의 건강 문제로 다른 동료들처럼 회사를 떠나지 못하고 회사로 돌아온 인물. 회사는 그녀를 총무과로 보내 보란듯 숱한 비품들처럼 창고에 쳐박아놓았고, 팀원을 달라는 상수의 강경한 주장에 그녀를 상수의 팀으로 보냈다. 그곳에서도 무슨 책이 잡힐까 업무에서 벗어나는 딴짓조차 하지 않고 무슨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며 쉽사리 곁을 주지 않던 사람. FRANKENSTEINFREEZ-ING이라는, 긴 아이디를 쓰는. 이미 결혼한 선배 산주와 아주 오래 전부터 끊을 듯 끊지 못하는 관계를 아슬하게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의 사이에는 은총, E의 상실이 존재했다. 두 사람 모두 한때 그와 무언가 깊은 것을 공유했으며, E의 상실과 함께 그와 나누었던 것 이상의 무언가를 잃었다. 예를 들면 ‘따뜻함’ 같은, 아주 평상적인 감각들을.

 

 경애는 E를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나타나면 물어보려고 했던 말, E가 사라지고 그후 상수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물었다. 
 농담이 아니라 살이 쪘어요. 더 뚱뚱해졌어요. 봤잖아요. 
 그랬죠. 아, 사진으로 남겨놨으면 좋았을걸. 
 그런 흑역사를 왜 박제합니까. 근데 경애씨는 어땠어요? 
 경애는 휴대전화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상수가 물으니까 더 정확하게 답하고 싶었다. 어떤 단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ㄱ과 ㅅ, ㅈ, 혹은 ㅗ와 ㅣ와 ㅓ 사이를 손가락들이 부지런히 오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떤 말 하나를 골라내기는 어려웠고 이윽고 경애는 다른 단어들은 공중으로 다 밀어내고 아주 추웠어요,라고만 적어 보냈다. (P.274) 


 둘은 은총이 있던 과거의 기억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은총이 좋아하던 감독의 신작 영화가 상영되던 영화관에서, 은총이 직접 찍었다고 보여준 단편영화 속에서. 그 기억들은 상수와 경애를 이어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실의 기억, 상실 후의 자신의 삶, 그런 기억들을 공유하며 둘은 가만히 서로를,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내게 이 소설의 키워드는 ‘유대’로 느껴졌다. 은총의 상실을 통한 경애와 상수의 유대뿐 아니라 상수가 ‘언니들’과 나누는 수많은 유대, 경애와 파업을 함께 했던 동료들의 유대, 조 선생과 창식씨의 유대 등. 물론 어떤 유대는 오해로 해지거나 너덜너덜해지기도 하고, 뾰족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유대하던 그 순간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유대란 진심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유대 속에 어떤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통했던 순간마저 송두리째 버려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마음을 어떻게 폐기하느냐고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그 사람이 나 너랑 전처럼 자고 싶어, 따뜻하게,라고 말한 날이 있었고 당신은 결정했고 그렇게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자 정작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옷을, 양말까지 챙겨 신은 뒤였다고. 그러고 나서 데려다주겠다는 그 사람 차에 타지 않고 택시로 강변북로를 달려 돌아오는데 자신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잖아요. 그 새끼 뭔가요, 뭐, 사람 테스트해본 겁니까. 대체 어떤 욕을 해주어야 하나, 아주 고퀄 레전드급으로 쌍욕을 하고 싶지만 언니,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P.176) 

 

소설은 현실적인 결말로 향한다. 경애는 결국 회사에 꼬투리를 잡혀 전혀 상관 없는 업무인 물류센터로 밀려나고 그에 저항해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다.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의 해킹 사태를 만나 남자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계속 숨고 숨다 마침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로 마음먹는다. 일들은 극적일 것도 없이 평범하게(그러나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되어가고, 경애와 상수 사이에는 아직 이렇다할 분명한 감정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따뜻하게 와닿는 이유는, 소설이 다루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면면 – 경애의 1인 시위장소를 돕는 옛 동료나, 그 장소를 지나가며 이렇게 하면 시위법 위반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김유정 팀장 같은 사람들, 경애의 파업일기에 공감하고 과거의 상처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의 익명들 –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경애(敬愛)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상실로 인해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한 마음을 갖고 살아온 경애와 상수가 서로를 마주하고 서로를 통해 그 공백 역시 소중한 마음임을 깨닫고 다른 마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10월의 어느 깊은 가을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에 관한 회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밤 내내 여러번 반복된 이야기는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라는 경애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같이 울었던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P.352) 


 부정하고 싶고, 잊고 싶고, 원망하기도 했던 수많은 마음을 가져왔던 과거와 현재의 나에게, 그리고 나와 비슷하거나 내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마음을 가져왔던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경애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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