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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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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은 눈을 멀게 하지.

 

스포 많음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 도련님 루벤. 어느날 그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마리가 오게 된다. 마리는 그에게서 도망가지 않고 그를 찍어누르고, 루벤은 마리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마리는 남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영화에는 마리가 어려서 어머니에게 받았던 폭언과 폭력들이 조각조각 나타난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영화 초반부에 마리가 읽어주는 <눈의 여왕> 속의 거울 조각이 생각났다. 사람들의 눈과 심장에 박혀 세상 모든 것을 미워보이게 만들고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거울 조각.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박아넣는 혐오의 조각은 그보다 훨씬 날카롭고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한다.

 마리는 루벤에게 거짓말을 한다. 주로 자신의 외모에 대한 거짓말이다. 백금발을 가진 마리는 루벤의 상상 속에서 붉고 긴 머리칼을 휘날린다. 루벤의 상상 속 마리는 사랑스럽고, 루벤은 금세 사랑에 빠진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색감 없던 영화는, 루벤의 상상 속 모습을 선명한 색채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루벤을 피하던 마리 역시 사랑에 빠진다. 당신이 아름답다는 말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마리의 심장 속 얼음조각을 녹이고 그녀는 이제 이따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기도 한다.

루벤 저택에서 함께 살게 된 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 이전의 마리는 거울을 무조건 가리고 절대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루벤의 어머니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녀의 모든 것이 거짓 위에 쌓아졌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대사 중 이런 게 있었다. 루벤이 판단할 거라고, 진정한 자신을 봐줄 거라고 항변하는 마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게 눈 먼 사랑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이 말은 나중에 나올 마리의 편지와 연결되어 들렸고, 루벤의 상황과 겹쳐져 더 묘하게 들렸다. '눈 먼 사랑'. 진정한 사랑은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의 눈을 가리우는 걸까.

 마침 루벤의 눈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마리는 두렵다. 루벤이 눈을 뜨면, 자신을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루벤과 함께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루벤이 수술을 받는 동안 그녀는 혼자 조용히 사라진다.

 루벤은 시력을 찾아간다. 회복하는 내내 마리를 찾았지만 그녀는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이제 루벤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볼 수 있음에도 천으로 눈을 가리고 면도를 한다. 눈을 가리면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손길이 느껴진다.

 마리를 찾고, 찾지 못하고, 루벤은 훌쩍 여행을 떠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날 루벤은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마리는 그를 보고 숨지만, 이내 그의 곁으로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루벤은 그녀에게 안데르센의 동화를 찾아달라고 한다. 책을 건넨 후 돌아서 가는 그녀의 향기를 맡고, 그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 루벤은 마리를 마침내 찾아낸다. 하지만 마리는 돌아갈 수 없다며 그를 뿌리친다.

 집에 돌아온 루벤은 마리가 떠나기 전에 쓴 편지를 받는다. 

 

내 사랑 루벤. 이 편지를 읽을 쯤이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보고 있겠지.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 네 손끝으로 본 세상일 거야.
내 사랑, 나를 기억해줘. 네 손 끝, 네 귓가에 남은 나를.
너로 인해 나는 놀라운 사랑을 봤어. 가장 순수한 사랑.
진실한 사랑은 보이지 않아. 영원함도 그렇고.
마리.

 

(이게 영화 자막은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찾아보니 없네... 여튼 영화 자막에서는 '진정한 사랑은 눈을 멀게 하지'라고 번역이 되었었고, 나는 그 부분이 참 좋았었다.)

 

 루벤은 집 밖으로 나와 아름다운 세상을 한바퀴 둘러본다. 찬찬히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다시 눈가리개를 한 루벤이, 봄의 짙은 초록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다. 그 미소가 너무 행복해서 나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저 순수한 행복, 순수한 사랑을 찾기 위해 루벤이 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사실 옛날에 한 번 봤던 영화였는데, 그때와는 감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때도 안타깝긴 했지만, 이 순수한 사랑과 열망에 감명 받은 느낌이 컸다. 그런데 이번에 보면서는 루벤과 마리가 너무 안타까웠다. 특히 마리가.

 루벤의 의사가 마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음의 상처 역시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학대받아온 마리의 마음을 치유하고 마리가 진정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 둘의 사랑의 모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루벤이 조금 더 성숙한 후에 마리를 만나 마리를 서서히 녹일 수 있는, 그렇게 설득할 수 있었다면 둘은 더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마리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루벤은 처음에는 그 거짓을 듣고 상상한 마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사랑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루벤이 사랑한 게 정말 마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르겠다. 시작이 그러했대도 마리의 목소리와 향기와 전해지는 마음 속에서 진정 마리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반면 마리의 입장에서는 시작이 그러했기 때문에 루벤의 순수한 사랑을 받는 일이 더 두려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처음으로 가져본 따뜻함을 '이게 나이기 때문에'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겁이 날까. 그래서 그렇게 도망쳐야만 했을 것이다, '나'를 보는 순간 변하는 차가운 눈빛을 보면 더 상처 받을 테니까. 따뜻한 사랑을 알아버린 만큼 변한 냉혹한 시선은 더욱 나를 얼어붙게 만들 테니까.

 

 영화에서는 고요하고, 면도하는 소리나 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 아주 작은 소리들이 귓가에 크게 들린다. 마치 내가 루벤이 된 것처럼. 그런 요소들이 이 영화를 조금 더 감각적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살짝 언급했듯 내내 어둡고 색조가 빠져 있던 영상은 사랑에 빠진 루벤의 상상을 그려낼 때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띤다. 루벤이 시력을 찾았을 때조차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던 색채들.

그러고 보면 마리가 처음 책을 읽어줄 때 루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계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마리를 통해 루벤은 기린이 걸어다니는 정원을 보고, 코끼리며 원숭이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준 사람을 어떻게.

 

 여러 모로 곱씹어보게 되는 여운을 가진 영화였다. 앞으로도 쌀쌀하고 우중충한 날에는 이 영화가 종종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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