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은 매일 아침 신문사에 팩스로 보내지는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두 젊은 언론인들의 기자회견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두 젊은이는 피고로 서게 되고, 법정이자 광장이자 극장인 그곳은 내내 극의 무대가 된다.
검사측은 이들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고 국익을 해했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기소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의 안보와 국익을 위한 것이며 자신들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호소한다.
지금은 한 법정에서 두 피고인과 변호사, 검사와 판사로 만난 이들은 모두 대학시절 한 연극 동아리에서 만났던 사이이다.
극은 법정에 선 그들과 대학시절의 그들을 교차시켜가며 보여준다.
- 극을 보는 내내 다시금 국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동독 출신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서로 지정된 '갈릴레이에 대하여'라는 연극을 올린 후 이들 젊은이들이 고문실로 끌려갔을 때, 고문관은 이들에게 국가를 위해 살라고 말한다.
국가를 위해, 아홉 명 중에 한 명에게는 모진 고문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국가가 '발전'이라는 것을 이유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진정한 국가라면 국민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를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억압과 폭력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수의 시민을 착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안보와 국익, 사회 기강 등을 운운하며 단지 사회과학서를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시위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이는 것은 결코 국가의 이름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다.
이는 오늘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의 소위 '보수'라고 하는 정당들의 세태가 그렇다. 그들은 그들만이 애국하고 국가를 위하고 안보를 튼튼하게 세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 자신만의 배불리기에 급급하다는 생각이 늘 든다.
내가 정치시간에 배운 '보수'란 전통을 유지하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는 어떠한가? 그들은 보수라는 이름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돈결이 '정의'를 추구하는 검사가 된 것 또한 그가 기득권의 세력에 속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늘 배부르고 등따숩게 살아온 그로서는 현재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바로잡는다는 '정의'가 옳을 수밖에.
처음 연극 동아리에서의 독백 때도 선배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던 돈결은 최후 변론에서도 자신의 말 대신 법정의 언어를 택한다.
그가 택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걸인이고 혁명가이고 싶던 자신을 철저히 없애야만 했으리라.
- 극에서는 '독백'을 크게 다룬다.
연극 동아리 시절 햄릿을 다루며 처음으로 '독백'을 접한 그들.
독백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어느 한 사람이 그토록 길게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돈결은 선배가 했던 독백을 그대로 따라한다.
승욱은 인물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그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대사를 한다.
주혁은 금지된 노래를 부른다.
독백은 이렇듯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말이다. 자신만이 말할 수 있는 진실이다.
어느 대학생은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며 투신하였고, 마지막 독백인 유서를 남긴다.
진실이 담긴 독백은 강하다.
정배는 웃음기와 장난기가 많은 낙천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잡지 '독백'을 펴내는 것은,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하는 이 공포가 갑갑해서.
누군가는 이렇게 독백을 통해 간신히 숨을 쉬기도 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숨을 토해내고 절규같은 독백을 토해내며.
- 그리고 사람.
동아리의 여선배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왜 빨갛게 보느냐고 묻는다.
고문실의 고문관은 사람, 사람, 사람보다 국가가 우선한다고 말한다.
정말? 정말 사람보다, 그 한명한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까?
- 고문실에서 교수가 무릎을 꿇고 풀려난 학생들에게 어디로 가겠냐 물었을 때.
돈결은 정의. 승욱은 방향. 정배는 독백. 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판결이 난 후 다시 교수였던 판사가 물었을 때.
돈결은 정의. 승욱은 지침. 정배는 숨. 주혁은 "몰라서 묻냐"고 대답했다.
침묵하다가 조용히 순응하고 조심조심 숨 쉬며 살 수도 있었을 주혁은,
암전 직전 고개를 들어 정면을 형형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 눈. 그 눈으로 앞으로도 "몰라서 묻냐"는 질문을 하며 살아가겠지.
- 최후 변론에서는 승욱과 정배의 말이 마음을 울렸다.
방향을 찾아가겠다고 했던 승욱은 여전히 그 방향을 찾기 위해, 주위의 지침들을 따랐다.
그리고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지침을 인생에 새기는 것을 택했다.
이 재판의 기록이 유령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길 원한다며 열변을 토하던 승욱.
삶과 타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아예 각인해버리는 그의 신념이 인상깊었다.
삶과 타협하는 것. 주혁네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그러했고, 교수 역시 그러했다.
교수는 찰나의 빛을 위해 벌거벗고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싫어 '균형'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가 왜 균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의 절박한 외침을 듣고 있으면 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갖은 욕설을 듣고 개처럼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하던 편집국장이 주혁에게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외쳤을 때 그러했듯이.
커튼콜에서는 인물들이 관객들과 함께 '소나무야'를 허밍한다.
소나무처럼 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소한 그 신념, 사람을 향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의 방향은 무엇이고 지침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