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못 바꾸잖아요."
이 극은 대림외고 3학년 독어과 A반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준다.
주축이 되는 인물은 네 명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며 공부를 잘해 성공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진 명준.
제주도에서 올라와 제주도 사람이라고 무시했던 애들 다 기죽일 수 있게 성공하고 싶은 수환.
야구부 주장으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다 졸부 부모님 덕에 외고로 전학 온 종태.
그리고 좋은 집안, 반장, 잘생긴 얼굴, 모든 게 완벽한 엄친아 민영.
'백색 느와르'라는 장르를 표방하는 극 답게, 폭력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네 인물 간의 권력 관계와 기싸움은 쫀쫀하다.
관객에 따라 가장 이입이 되는 인물이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에는 명준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명준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다. 그렇기에 명준에게 걸리는 기대의 눈빛은 너무나도 무겁다.
없는 놈이 성공하려면 공부밖에 없다고, 명준이 서울대 가는 희망으로 사신다는 아버지.
'명준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아버지의 목소리.
명준이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tv를 볼 때도 이어폰을 끼고 보는 어머니.
큰방을 공부방으로 내주는 부모님.
이 모든 것은 명준에게 '어떻게든 1등급이 되고 성공해야 한다'는 비뚤어진 열망을 심는다. 어떻게든.
동시에 이것은 명준에게는 일종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어른이 되면 절대 저렇게는 안 살 거라는, 저런 모습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원동력.
수환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고생하신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다는 생각과 '노란 손'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수환을 공부하게 한다.
둘이 서로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공부방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인 것 같다.
수환의 '노란 손' 이야기와, 명준의 '짠 사과' 이야기.
그리고 둘은 이 작품의 중심 사건이 될 '짜고 치는 고스톱', 수학 컨닝을 모의하게 된다.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들게 되는 게 종태라는 인물이었다.
우연히 화장실에서 둘의 컨닝 모의를 들은 종태는 이들에게 그만두라고 한다.
하지만 명준의 교묘한 제의에 종태 역시 컨닝에 합류하게 된다.
종태는 이 '모범생들'의 정글 속에서 가장 순진하고 착한 친구로 보였다.
명준과 수환을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쩌면 바보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친구들을 위하는 마음은 진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어긋난 길 위에 서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을 따르는 종태도 잘못된 방향을 잡은 것일 수밖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을 따랐다고는 하나, 그 방향을 택한 것은 종태의 의지라는 점일 것이다.
종태는 수학 답안지를 사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따라가다 범인이 반장인 민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출석부에서는 흰 봉투에 담긴 3백만원과 함께 답안지를 사려 한 정황이 담긴 쪽지가 나온다.
셋은 이것을 빌미로 민영을 협박하며 한 가지를 요구한다. 중간고사 수학 시간 때 수학 답안지를 97점에 맞춰 작성한 후 흘리라는 것.
자신이 수학 답안지를 산 것이 아니라는 민영의 항변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장면 전까지의 민영은 실없는 개그를 잘 하고 친절하고 똑똑한 그런 아이였다.
그러나 태어나서 맛본 적 없는 굴욕을 이들 삼인방 때문에 맛본 후, 냉혹한 본성이 드러난다.
민영의 치밀한 계획으로 삼인방은 큰 곤경에 처한다.
반 아이들이 모두 컨닝 사실을 알게 되고, 명준은 컨닝을 포기하기 싫어 아이들 전부를 끌고 갈 계획을 짜는데,
민영이 100점짜리 답안지를 따로 흘려 반 전체가 수학시험 100점을 받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셋은 수학 시험이 끝난 후 민영을 화장실로 불러 사태 수습에 나서려 한다.
이때 화장실에서 민영의 말을 들으며 명준은 알게 된다.
민영은 정말로 수학 답안지를 산 적이 없다는 것. 모두 민영이 스스로 풀었다는 것. 그리고 민영은 그럼에도 100점을 가뿐하게 받는다는 것.
명준으로서는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돈 있는 새끼들은 돈으로 공부하니까, 그러니까 돈이 없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것일 뿐, 진짜 실력으로만 놓고 보면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그건 명준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테다.
그래서 명준은 민영에게 수학 답을 다시 불러달라고 무릎을 꿇으면서도 결코 민영이 그것을 자력으로 풀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무릎을 꿇는 장면이 이렇게 안 불쌍해보이기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명준이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성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인 듯.
하지만 민영이 'testament'의 뜻을 외우기 위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명준은 무너진다.
민영은 모두 가졌다는 것. 돈과 부모님의 권력뿐만이 아니라 머리마저도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수학 시험 직전, '지금부터 50분동안 반 전체가 내 손 안에 있다'며 모두의 위에 올라선 그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웃던 명준은 이제 한없이 추락했다.
그래서 명준은 더욱 민영에게 매달린다. 자신을 말리는 종태의 목을 조르면서까지.
이제 명준은 너무나도 절박하다. 마치 이번 수학 시험이, 민영이 상위 3%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그때 민영은 명준에게는 가장 무서운 말을 한다.
"내가 불러줘도 넌 너네 아빠랑 똑같이 살 거야."
명준이 절망해 멈춘 사이 종태가 민영을 때리고, 그 때 선생님이 들어온다.
명준은 컨닝한 흔적을 숨기기 위해 시험지를 씹어 삼킨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도 씹기만 하지 삼키지는 못했던 종이를, 꼭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면서도 삼키는 모습이 처절하다.
바로 이어지는 가로등 7인방과 명준의 씬은 그 처절함을 배가시킨다.
명준은 가로등 7인방에게 자신이 민영에게서 들었던 대사를 똑같이 친다.
너 군대에서 좆뱅이 칠 때 나는 유학 가고, 대학원 가고, 회사 차리고. 난 슈퍼맨이다?
유일하지만 아주 큰 차이는, 민영의 말은 팩트이지만 명준의 말은 단지 허세라는 것.
그게 그렇게 슬픈 이유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명준의 열망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결국은 얻어맞아 바닥에 누운 채로 안 진다고 발버둥을 치는 명준의 모습.
여기서 끝났으면 명준이도 참 불쌍한 놈이야... 했을 텐데, 극은 명준에 대한 동정의 여지를 끊어버린다.
명준과 수환은 처벌을 피하려 서울대 원서, 생활기록부 같은 것을 들먹이고, 결국 종태는 모두 자신이 한 일로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런 종태에게 둘은 사유서를 작성해서 줄 테니 그대로 읽으라며, 자신들이 편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종태는 교무실로 가고, 명준과 수환은 그런 종태의 양 옆에서 종태가 반성문 읽는 것을 거든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여러 번 봤지만 이 장면은 차마 눈을 제대로 다 뜨고 볼 수가 없다.
명준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자신이 민영에게 짓밟힌 만큼, 자기보다 아래 계층에 있는(아마 명준의 계산으로는 그럴 거다. 명준에겐 모든 게 성적과 등수로 판가름 나니까) 종태를 화풀이삼아 짓밟으려 했던 걸까?
민영의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최후의 보루'로 지금까지 끌고 왔던 종태를 그만큼 잔인하게 짓밟아야 한다는 계산이었을까?
반성문 첫 장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수환과 명준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스스로 나서서 편을 들어주던 종태.
종이 위에 쓰여진 내용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믿을 수 없어 떨고 울면서도 끝까지 그것을 읽어나가는 종태의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서 반성문을 계속 읽으라는 사인을 주는 수환이나, 세상 제일 조신한 모범생인 척하는 명준과 대비돼서 이 장면이 어느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보다도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 장면의 마지막에서 명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저희, 모범생들이잖아요."
그리고 웃는다. 세상 둘도 없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인 것처럼 하얗게.
종태는 경악하여 그 모습을 바라본다.
대체 '모범생들'이 뭐길래?
이 극은 고교 시절의 컨닝 사건과 현재 민영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세 친구의 모습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내려는 종태에게 수환이 흰 봉투를 건넬 때, 종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흰 봉투 싫더라. 너무 하얘서 속을 알 수가 없어."
아마 종태에게 '모범생들'은, 명준과 수환은 그 흰 봉투와 같았으리라.
겉으로는 새하얗고 결백해보이는 모범생들이었고, 그들과 같은 무리에 끼는 것을 동경하게 했지만, 실제로 그 속내는 더러웠던.
또, '어른'이라는 단어도 이 극을 통해서는 새롭게 다가왔다.
명준과 수환이 화장실에서 컨닝을 모의하다 종태에게 들키고, 그런 종태를 교묘하게 끌어들이는 말을 던진 뒤 종태가 나가자, 수환은 명준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렇게 말한다.
"대단하다. 너 꼭 어른 같아!"
어른이 뭐길래? 자신에게 유리한 계산을 하고 상대방을 이용하려 조종하는 것?
명준은 민영 때문에 궁지로 몰린 뒤 반 전체를 컨닝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하다가, 따라오지 않는 종태와 수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도로에서 쇼를 벌이는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빠? 담임? 저새끼? 내가 어른이 되면 난 절대 그렇게 안 살 거야."
촌지를 주지 못해 명준의 담임에게 전화기 너머로 굽신거리는 엄마.
지나가던 취객을 치고 경찰서에 앉아 명준에게 넌 절대로 나처럼 살지 말라던 택시 운전사 아빠.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반 전체가 컨닝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모른척 하던 담임.
한심한 학교 나와서 한심한 직장 다니면서 한심한 월급 받으면서 이 세상 한심하다고 욕하다가 집에는 기어들어가겠다고 나왔는데 피곤한 명준의 중졸 아빠 택시에 꽝 치인 남자.
최소한 명준이 봐온 어른들은, 명준 주변의 어른들은 죄다 명준이 절대로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은 한심한 모습들이다.
그럼 이들은 과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수환은 대변인이 되어 있고, 명준은 대기업의 회계 실세다.
이들은 자신의 직업과 가진 것을 과시하고, 상대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사이고 정계 진출을 눈앞에 둔 민영의 결혼식에 와 있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마치 누구보다 좋은 친구인 척, 자신이 왔음을 인지시키려 하고, 신랑에게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친다.
'난 너희 올 줄 알았다'는 종태의 말 그대로다.
아마 명준은 평생을 그렇게 살 것이다.
상위 3% 그 자리에 올라서려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면서.
그러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누군가에게는 무릎을 꿇어가며,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마지막 장면은 명준의 악몽이다. 명준은 종태에게 답안지를 내밀지만, 종태는 그것을 씹어먹어버린다.
친구들이 있던 자리 불이 하나 둘 꺼져가고, 명준은 홀로 남는다.
명준은 '씨발'을 되뇌이지만 거기엔 분노도 짜증도 없다. 그저 공허한 욕 한 마디.
특히 지난 몇 년 새 유행한 '수저론'이 극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있다.
더 무서운 건 교육 시스템과 사회의 시선이 만들어낸 어린 괴물들이고.
항상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암기, 등수와 등급과 점수에 목 매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보다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고 다른 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모의고사 성적이, 내신 성적이, 수능 성적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게 하는 교육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던데.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런 교육이 정착되길.
명준이 같은 괴물이 만들어지지 않고, 이 극이 언젠가는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고전극으로 느껴지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