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초연이 오늘로 막을 내렸다.
윌휴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 고민 하지 않고 프리뷰 예매를 했었다. (비록 비행기 연착으로 못봤지만....)
일찍이 윌휴의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를 단 한 번 보고 그 기억과 OST만으로 몇 년을 앓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점 언제 온다구요...?)
그리고 윌휴의 감성은 아니나다를까 내 취향을 탕탕탕 저격하였고, 이제 이 작품은 올리버의 화분만큼이나, 클레어의 반딧불만큼이나 내겐 너무 소중해졌다.
배경은 2050년쯤으로 추정되는 가까운 미래, 버려진 헬퍼봇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올리버는 재즈 잡지를 읽고, 낡은 레코드 플레이어로 재즈 레코드를 듣고, 화분과 함께할 수 있는 자신의 방 안이 근사하다고 믿고,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늘 똑같은 일상, 늘 반복되는 하루들. 하지만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면 언젠가는 옛 주인이자 친구인 제임스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열 밤만 자면 데리러 올게' 하는 말에 제대로 세지도 못하는 숫자를 손가락 꼼지락대며 필사적으로 세는 아이같다.
그러나 어느날, 재즈 잡지를 배달해주던 우편배달부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더 이상 안 만든대. 헬퍼봇 5 부품 말이야."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던 올리버는 곧 그 의미를 깨닫고, 평소처럼 우편배달부에게 동의를 구하는 말을 건다.
늘 그 말을 무시하던, 이제는 나이가 먹은 우편배달부는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인 올리버에게 처음으로 대답을 해준다.
그리고 올리버는 이어서 노래한다.
오늘 서울 하늘 구름 조금 많음. 오늘 나의 하룬 어제처럼 같음.
막연했던 '끝'을 선고받은 올리버의 마음은 서울 하늘처럼 구름이 끼고, 어제와 같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 장면에서 물기 어리는 올리버의 눈을 보며 나 역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클레어 역시 끝을 알고 있다. 클레어는 그 끝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작아지지 않는다.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1분 1초 매순간 나답게 살아가는 것.
이렇게 당차게 노래하는 클레어를 볼 때도 눈물이 났다.
씩씩한 클레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그 사랑스러운 존재가 결국은 끝을 맞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으리라.
이미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 존재가 안쓰럽지만 참 사랑스러워서.
충전기가 고장난 클레어에게 충전기를 빌려주고 되받으며 친해진 둘은 제주도로 떠나게 된다.
올리버는 제임스를 만나러, 클레어는 반딧불을 보러.
이 여행은 두 로봇에게는 모험 그 자체이다.
올리버는 제임스에게 가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병을 모을 때를 빼고는 자신의 근사한 방에서 나가본 적이 없는 로봇이다.
클레어 역시 친구들이 거의 다 완전히 고장나버려 함께 제주도까지 여행할 친구는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언제 끝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무모한 모험인 것이다.
이렇게 두 로봇은 처음으로 낯선 세상 속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My Favorite Love Story'이다.
두 로봇이 연인인 척을 하기 위해 지어내는 러브 스토리. 장난스럽게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사실 어햎은 보는 내내 유독 눈물이 많이 나는 극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눈물이 날 때마다 감정의 라벨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때로는 이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사랑스러워서, 때로는 벅차올라서, 때로는 정말 가슴이 아파서.
My Favorite Love Story도 들을 때마다 우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저들이 고장나고 낡아가는, 끝이 이미 보이는 헬퍼봇들이 아니라 평범하게 사랑을 하는 남녀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에 괜히 슬퍼질 때도 있는 것 같다. 혹은 사랑을 아직 모르는 이 로봇들이 그리는 사랑이 너무 아름답고 순수해서.
그땐 온 세상이 고요해졌던 것 같아 내 심장소리만 들렸던 것 같아
이 가사는 들을 때마다 너무 벅차다.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을 너무 잘 그리고 있는 것 같아서.
비 오는 뉴욕이 거리, 작은 우산, 그 속으로 뛰어든 작은 사랑. 그 모든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고, 순간 그게 내 얘기였던 것도 같아서.
우리 처음 손을 잡았던 그 봄의 어느날
우리 처음 입맞춤을 한 따뜻했던 저녁
내게 처음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던 밤
너를 처음 내 품에 안고 잠에서 깬 아침
마치 그땐 그땐 온 세상이 고요해졌던 것 같아
내 심장소리만 들렸던 것 같아
첫사랑의 풋풋한 떨림을 어떻게 이렇게 잘 담아낼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너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던 그 순간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 이 노래를 부르는 로봇들은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한다.
헬퍼봇들은 자율적인 사랑이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 안돼있으니까.
클레어는 전 주인들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을 보고 여주인과 함께 상처를 받은 로봇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주인과 친구였다는 올리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극의 영어 제목이 'What I learned from people'이라고 한다.
클레어가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은 영원한 마음은 없다는 것.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는 것.
하지만 올리버가 제임스로부터 배운 것은 진짜 우정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
그렇기에 올리버는 작은 방 안에서 매일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 제임스를 끝없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는 방 안을 한 발자국 떠나는 것도 두려워하던 그가 제임스를 찾아 제주도까지 기나긴 여행을 오게 된 것이고.
비록 제임스는 죽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올리버를 생각하며 올리버 앞으로 유품을 남긴 제임스의 모습을 보며 클레어 역시 진정한 우정과 마음을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이 로봇들이 인간으로부터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었다.
자율적인 사랑이 프로그래밍 되지 않은 로봇들이 어째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 프로그램 에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그게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계적으로 짜여진 프로그래밍마저 파괴해버리는, 사랑.
이 둘이 반딧불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는 순간과 그 순간의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 아름답고 벅차다.
어느 순간은 그 반딧불이, 두 달밖에 살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두 달을 보내는 그 반딧불의 모습이 마치 올리버와 클레어의 모습처럼 느껴져서 눈물이 났을 때도 있다.
병 안에 반딧불 한 마리를 가두고, 소중하게 반딧불을 보며 노래하는 둘.
어느 순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서울로 돌아온 둘은 사랑이란 감정을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넘버에서 연주가 고조되며 둘이 일어나 둘을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는 장면도 참 벅차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깨닫고 서로에게 달려가다 복도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둘.
처음으로 손이 닿는 순간,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선을 느끼고, 서로를 만져보고, 그리고 첫 입맞춤.
이 모든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손이 닿은 것뿐인데도 멈출 수 없는 전율.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마주보는 그 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입을 맞추는 순간에는 마치 날아갈 것 같은.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너무나도 벅찬 사랑의 감정이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온다.
First time in Love라는 넘버로 둘은 처음 알게 된 사랑을 노래한다.
이 장면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나타나는 클레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My Favorite Love Story를 부를 때에는 빨간 레인코트에 빨간 모자라니, 나는 빨간색은 입지도 않는다고, 네가 산타를 만난 모양이라고 비꼬던 그녀가 어느새 자신들이 만들어냈던 그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
둘이 춤을 추는 모습. 관심도 없는 레코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모습.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싸움을 하는 모습.
모든 게 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눈부신 사랑스러움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클레어와 올리버 모두 망가져가고 있다. 클레어에게 남은 날은 1년 남짓. 올리버에게 남은 날은 그보다는 조금 긴, 900일에서 1200일 정도.
내구성이 강한 헬퍼봇 5라는 사실이 이렇게 원망스러워질 줄을 올리버는 알았을까.
사랑에는 벅참과 아름다움과 설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망가져가는 상대방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슬프다는 것을 이 둘은 사랑으로 인해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멈추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는 자신은 괜찮다고 말한다.
비록 끝이 정해져 있음을 알지만 남은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자고. 완전히 멈추는 그날까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자고. 그렇게 클레어의 앞에서는 애써 웃어보인다. 그 뒤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무너지더라도.
너와 나 잡은 손 자꾸만 낡아가고 시간과 함께 모두 저물어간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 해
하지만 클레어의 끝은 점점 다가온다. 춤을 추다가도 망가져버리는 팔. 올리버의 레코드판을 들고 장난을 치다가도 고장으로 힘없이 레코드판을 떨어뜨려버리는 클레어. 클레어의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어보이지만 클레어가 떨어뜨린 레코드판을 주워들면서 한없이 무너져내리는 올리버. 그리고 그런 올리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클레어.
결국, 클레어는 더는 못하겠으니 그만하자고 올리버에게 말한다. 클레어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까지 괜찮은듯 웃어보이던 올리버는 클레어의 말에 완전히 무너지고,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원하는 그 순간까지만 사랑하겠다고 했던 약속처럼.
이러한 이야기들이 흐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눈물 때문에 이 장면을 또렷하게 본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눈물 없는 깨끗한 시야로 이 장면을 보게 되길 바라기도 했다.
둘은 로봇이다. 사람들처럼 잊는 척을 한다고 해서 기억을 잊을 수가 없는.
그래서 둘은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화분을 창가에 너무 오래 두면 안 된다는 사실은, 밤에 외출할 땐 노란 비옷을 안 입어도 된다는 사실은 잊지 않아도 되지만.
종이컵 전화기를 사용하는 법은, 오래된 레코드의 지직거리는 따뜻한 소리는 잊지 않았으면 하지만.
다 잊기엔 너무 아까운 눈부시게 예쁜 기억들 그것만은 그것 하나만은 아무리 아파도 버리긴 싫은데
그것만은 잊어야만 해 그것만은 지워버려야만 해
우리가 얼마나 서롤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건 지워야만 해 그건 버려야만 해
그건 잊어야만 해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사랑이 이렇게나 가슴이 아프다니.
둘은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을 몰랐고, 슬픔을 몰랐다.
조금 외롭긴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익숙했고, 이대로 끝이 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대로 살아갔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 채 살아갔다면 둘은 해피엔딩이었을까.
어쩌면 그건 나름대로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아프고 괴롭지만, 둘은 서로를 통해서 성장했고, 좁은 세상을 서로를 통해 넓혔으니까.
혼자 알던 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시선을 배웠고, 한 가지 색깔로 가득했던 세상이 서로를 만나면서 온갖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을 테고, 심지어는 누군가 때문에 가슴이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둘이 다시 만났을 때. 클레어는 기억을 지운 채로, 올리버는 기억을 지우지 않은 채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올리버는 여전히 낡아가는 클레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나도 아플 테지만, 두려움을 접어두고 다시금 클레어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테다.
"괜찮을까요?" 하고 묻는 클레어에게 "어쩌면요"하고 대답할 수 있었을 테다.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무 아파서 후회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때 기억을 지웠으면 바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으니.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것의 곁을 지킬 수 있으니,
'어쩌면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올리버는 사랑으로 인해 한층 더 성숙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유독 약한 코드가 있는데, '끝이 정해진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그게 시한부 인생이든,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이든, 비극적인 결말임을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이든.
어햎 역시 그런 코드를 가지고 있다. 이미 낡아빠지고 망가져가고 있는 로봇들. 끝을 보고 있는 로봇들의 사랑이 마냥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로봇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너무나도 따뜻하며, 너무나도 순수하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말들을 한다. 이 로봇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매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벅찼다. 장면장면이 소중하고, 장면마다 흐르는 선율이, 가사가 하나같이 눈이 부셨다.
그래서 매번 눈물이 났다.
내 문을 두드려줘서 고마웠어.
문을 열어줘서 고마웠어.
안녕, 어쩌면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