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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책

테스

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집안은 가난하며, 부모는 제대로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느날, 소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안이 몰락한 귀족 가문이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용해 진짜 귀족처럼 살려는 꿈에 젖는다.

테스 더비필드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테스>를 읽으며 인상깊었던 것은 테스의 주체성이었다.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게 최고라고 믿고 그렇게 하기를 종용하는 부모와 달리, 테스는 스스로의 손으로 삶을 영위해나가길 원한다.

더버빌 집안으로 가게 된 것도 당나귀 프린스가 사고로 죽었기에 그에 대한 책임감을 지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도 테스는 그 아이를 낳게 한 자 - 알렉 더버빌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아예 그에게는 비밀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특히 죽어가는 아이에게 직접 세례를 주는 장면은 그 비극적인 상황 아래 간절한 모성, 그리고 테스의 강단 있는 모습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 이후에도 테스는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살아간다.

다만 아무리 진취적인 그녀라도 시대가 주입한 강박, 즉 자신이 '순결하지 않다'는 의식만은 어찌할 수가 없어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 에인절이 나타난다. 어릴 적 마을 축제에서 함께 춤을 추고 싶었으나 스쳐 지나갔던 소년.

에인절은 금세 테스를 사랑하게 되고, 열렬히 구애한다.

테스 역시 사랑을 어찌할 수는 없어 자신에게 했던 맹세를 저버리고 마침내 결혼을 승낙한다.

결혼 전에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자 했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첫날밤, 테스와 에인절은 서로의 모든 허물을 털어놓기로 한다.

에인절은 자신이 한때 방황하며 방탕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테스는 진심으로 그것을 용서하고, 그리고 기뻐한다. 자신 역시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인절은 테스의 고백을 듣고 그만 그녀를 떠난다.


사실 나는 책을 읽으며 알렉보다 에인절이 더 나쁘다고 느꼈다.

물론 알렉이 저지른 죄로 테스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에인절은 번번이 테스를 흔들어놓았고 마침내 테스 역시 죄를 짓게 이끌었다.


먼저 에인절은 테스의 과거를 쉬이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고, 테스의 경우에는 자의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테스를 떠나 아예 머나먼 브라질로 갔다.

떠나기 전 가족에게 테스의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끊임없이 테스가 '순결하고 정숙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병에 걸린 안쓰러운 모습으로 다시 테스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에인절 역시 시대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가풍에서 벗어나 땀을 흘리고 정직하게 수확하기를 바라는, 농부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실용주의자이다.

또한 그렇기에 농민들의 삶을 가까이하고 싶어하고 허례허식은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순결'이라는 가치만은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진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여자는 그러면 안 됨ㅋ' 같은 느낌이지만, 그만큼 시대가 엄격한 잣대를 주입해왔다고 생각해야겠지. 거의 의심할 수 없을 가치였을 것이다.

아니 그럼 적어도 용서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또 화나네..


나는 마지막에 차라리 에인절이 테스에게 나타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나타나려면 조금 더 일찍, 그러니까 테스가 그를 간절히 찾았을 때, '나는 당신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편지를 쓰기 전에 갔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멀쩡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나타났어야 했다. 

만약 행복한 모습의 에인절을 보았다면 테스는 차라리 그와 헤어졌음이 잘 된 일이라 생각하고 그의 행복을 빌어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테스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현실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음이 진정된 후 다시 알렉을 떠나 자신만의 삶을 찾으러 갈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비참한 모습의 에인절이 테스에게 나타나며 테스는 다시금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망쳤다는 크나큰 죄책감과 사랑을 잃은 슬픔에 매몰되고, 결국은 알렉을 죽여버리고 만다.


마지막, 떠난 에인절을 쫓아가 함께 도망가던 둘.

테스는 스톤헨지 위에서 너무나도 편안하게 잠이 든다.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 이교도의 상징 위에서야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는 테스를 보며,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속박과 중압감이 테스의 인생을 얼마나 칭칭 얽어매고 억눌러왔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테스처럼 자주적인 여성마저도 쉬이 벗어날 수 없던 굴레.

테스가 그런 삶을 벗어나 차라리 죽음으로써라도 진짜 자유를 찾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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