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은 많은 사람들이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 벼르는 책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에 마침내 대업을 완수했다.
태백산맥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역사책 속의 몇 줄 문장으로만 생각했던 당시의 삶, 특히 민중의 모습을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이 느꼈다는 점이었다.
1부에서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이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다.
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마침 남북정상회담 등 통합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데 책 속에서는 민족이 분열되기 시작하고 있어서 기분이 참 묘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친일하던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분노에 슬쩍 편승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역겨웠다.
'친일파 청산을 못한 건 이승만 때문이다'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속에서 친일하던 이들의 행태를 생각해본 일은 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을 보니 더 역겨울 수밖에. 오늘날에도 그들의 후손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념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해쳐가며 세워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손승호의 말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도...)
그가 괴로워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었다. 인간을 위한 주의가 아니라 어떤 주의를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변질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보면서 좋아하는 작품인 <거미여인의 키스>의 발렌틴도 생각났다.
문득 소설 속 인물들, 재산과 안정적인 삶, 그런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신념에 몸바치는 인물들이 오늘날의 북한, 몰락한 공산주의를 본다면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이루어내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신념이 잘못되거나 실패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옳다고 믿었던 시절의 열정과 헌신도 한낱 잠꼬대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일까? 그럼 그 인생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 혹은 신념이 있었던 그 때만큼은 찬란했다고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그러한 혁명가들의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아버지들은 내 아이에게 좋은 세상을 주고 싶어서 공산주의를 오외치는데 정작 아이들은 당장 고통받고 굶주리는 아이러니.
아주 먼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서, 라는 말로 당장 이 아이들에게 지금의 고난을 견디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이들의 의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아이는 아이다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이상을 위한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미 공산주의의 실패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기도 하고...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려가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만으로 인간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기본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든 악조건들을 척결해야 하는 마당에 그 기본조건에 대한 충족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한다. 그런 인내의 고통 없이 혁명의 성취는 얻을 수 없고, 혁명의 성취 없이는 그 기본조건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예적 삶 속에서 부모나, 자식이나, 배우자나 모두 하나같이 노예일 뿐인 것이다.
초반부에 잠깐 동학농민운동 이야기도 나오는데, 초반엔 깊이 공감 못했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동학농민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사이의 공통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세상.
반면,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모두가 한울이라고 한마음으로 일어났던 이들이 책 속에서는 서로 갈라져 싸우고 죽이는 모습들, 일본 순사들이 하던 짓을 서로에게 되풀이하는 잔인한 모습들을 보며 씁쓸하기도 했다.
2부에서 크게 다가온 것은 민중의 고단한 삶이었다.
작가의 묘사력 때문인지 책을 읽으면서 먹고 싶은 게 많아졌다. 꼬막(자꾸 여자맛에 비유해서 나중엔 좀 께름칙해졌지만), 찹쌀엿, 게장 같은 것들.
그런데 2부 시작하면서 먹을 게 없어 진달래를 따먹는 당시 가난한 이들에게 그런 게 얼마나 값졌을지 상상도 안 갔다. 그래서 그렇게나 맛깔스럽게 묘사가 되었던 걸까.
또, 차라리 신념을 가지고 어딘가에 발을 푹 담그고 있다면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민중들이 두 이념 사이에서 가장 고통받았을 것 같다.
본인의 의지도 아닌데 빨치산들의 해방구가 되었던 마을은 사상검증에 고문에 취조에...
역사책에서 '반민특위'라는 말은 배운 적이 있지만 '반민특위 습격사건'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벌 받고 수치를 감내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외려 큰소리치는, 그게 묵인되는 나라...
후에도 여러 번 느끼지만 대체 국가란 무엇일까? 특히 저 당시의 나라는 그걸 나라라고 할 수 있을지.
국가의 3대 구성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간신히 영토와 주권을 방금 막 일본에서 가져왔을 테다.
그리고 국민인데, 나라가 하는 꼴을 보면 과연 국민을 국민으로 생각은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국민의 생존권보다 좌익 척결이 먼저인 나라.
국민의 손으로 뽑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국회에서 그 지경을 하는 것을 보며 심재모는 어지러운 가치 혼란고 함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다시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좌익 무장병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양민들은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논리 앞에서 국민의 생존보호가 먼저냐 좌익척결이 먼저냐를 놓고 우선순위를 따지려는 자가 오히려 어리석을 뿐이었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세계반공투쟁에 한국의 참가를 선언한 반공국가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이어지는 기자의 말을 한참 생각해보았다.
일본이 패배하고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20여일의 공백기간동안 친일파들을 모조리 해치웠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 어떤 창백한 인도주의자는 법적 처벌기준도 없이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라는 거냐고 공박하고 들 수도 있겠지. 그럼,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살해하고 착취할 때 어떤 법적 기준을 가지고 했던가? 제멋대로 아니었는가 말야. 그런 일본놈들에게 붙어서 그놈들과 똑같은 만행을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데 무슨 법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에게 해방의 의미는 외적으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적으로 민족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네. 민족혁명이란, 민족반역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하는 인간혁명과 사회제도 전반을 뒤엎어 새로 창출하는 정치혁명, 그 두 가지가 평행적으로 완성되는 걸 말하는 것이지.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소설 속의 배경을 충분히 읽어 느끼지 않고 명제만을 들었다면, 나는 말이 안 된다고, 법적 근거 없는 처벌이 어딨냐고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장 우리 정부가 없고 외세에서 또 다른 외세에 나라가 통째로 넘겨지는 상황, 그리고 그때 미처 씻어내지 못한 오점이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라의 한쪽 구석에 곪은 채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보니 그리 쉬이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는 3부는 민중의 고통, 그리고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6.25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는 나라가 한층 더해져서 이걸 나라라고 부르는 게 아까울 정도다.
사상 앞에서 국민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흩어버리고, 자신의 목숨 하나가 귀해 국민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고립시켜버리는, 참 가관인 나라.
거창 학살 사건은 태백산맥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건이었는데, 그 장을 덮고 한동안 먹먹하고 울분이 차올라서 책을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소설이길 바라면서 검색을 하다가 참담한 마음만 깊어질 뿐이었다.
정도는 훨씬 덜하지만 방위군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초반에 계속해서 나오던 이념에 의한 살육이 전쟁이라는 상황 하에서는 국가가 무기도 없고 저항하지도 못하는 보도연맹 회원들에게 행하는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지 않는가. 암담할 뿐이었다.
그리고 6.25를 배울 때 보통은 전선이 어떻게 움직이고, 인해전술이, 인천상륙작전이, 그런 걸 배웠지 전선이 움직일 때마다 민중이 받는 그 어마어마한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태백산맥을 읽으며 그것을 생생히 느꼈다.
인민군이 정복했던 지역이라는 이유로 위장으로 인공기를 달고 들어가 만세를 외치는 주민들을 모조리 총살해버리는 현오봉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그런 무지막지한 괴물이 된 데는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잃은 게 큰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스쳐서 씁쓸해졌다. 결국 피는 피를, 복수는 복수를 낳는 셈인 걸까.
그러고 보면 나중에 미군에게 당한 광부의 아들들이 단체로 빨치산에 합류하는 모습도 나왔었지. (심지어 그 중 하나는 말리는 어머니를 총으로 쏘고 입산했다.)
이것이야말로 '골육상잔의 비극'이구나. 지금까지 문자 그 이상으로 느껴본 적 없는 그 말이 비로소 생생하게 느껴졌다.
뒤로 가면 갈수록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새로이 보게 된다.
한때 궁금했었다. 왜 옛날 지식인들은 그렇게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열광했을까.
내가 알았을 때부터 이미 공산주의는 북한과 동일했고, 그렇기에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백산맥 속에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투쟁에 임하는 빨치산들을 보면서 조금은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껏 지주에게, 일본에게 잔뜩 억눌리고 배 곯고 살아왔던 민중들이 비로소 모두가 평등해질 수 있는 사상.
모두가 동일하게 언권을 가지고, 비판을 통해 성찰을 하는 이상적인 사상.
아니, 다 떠나서 그저 인간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상.
(아 이렇게 공산주의를 좋게 생각하게 돼서 태백산맥이 예전엔 금서였구나!)
이렇게 이상적이고 좋은 사상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금 북한을 생각해보면 씁쓸할 수밖에.
모두와 동등하지 않고 혼자 군림하려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독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말만 수령동지라고 하면 뭐한담..
10권쯤에 김일성이 남로당 계열들을 숙청하는 것을 보면서 이해룡이 비판을 가하는데, 김범준이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거기서 공산주의의 변질을 느꼈었는데, 더 무서운 건 존경하는 김범준의 말을 들으며 초점 나간 눈으로 합리화하는 이해룡이었다.
언뜻 1984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빅브라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자기비판이라는 요소를 잃게 되면서 이런 변질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태백산맥 속 빨치산들의 투쟁은 숭고하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은 순결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역사투쟁'이 선언되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은 싸우기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잠시나마 인간적인 세상을 보여주었던 공산주의에 깊이 감사한다.
유언처럼 한 마디씩을 남기는 그들의 모습에 콧잔등이 매워졌다.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받는 삶을, 자신은 누리지 못할망정 역사 뒤에 올 누군가에게 선물처럼 주고 싶어 죽음을 각오하는 모습들.
신념의 힘은 어디까지인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줄기는 장애물들을 만날 때마다 부딪치고, 깨지고, 부서지고, 휘돌고, 솟구치고, 나뒹굴고, 처박히고, 맴돌이질쳤고, 그러면서도 흩어지거나 멈추지 않고 하나로 뭉쳐 끝끝내 목적하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아아, 저 물의 흐름은 혁명의 과정과 같지 않은가! 혁명에는 그 얼마나 장애가 많던가. 그 장애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가. 수많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그 핏빛처럼 처절한 외침을 남기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저 줄기차게 울려퍼지는 물소리는 그들이 남기고 간 함성이다. 그리고 또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받아 외치고 있는 함성이다. 혁명에 이르는 그날까지 물줄기의 격렬함으로, 물줄기의 끈기로 싸워나가야 한다... 싸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결국 휴전은 이루어지고, 휴전선 이남의 빨치산들은 끝까지 몰리고 몰려 결국 하나둘 스러진다. 한때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던 지리산에서, 그 혹독한 겨울을 끝내는 이겨내지 못하고.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피를 흘려가며 만들려던 세상은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 아직 그런 세상은 아닌 것 같아 더욱 씁쓸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10권 분량의 소설로 함께한 빨치산들의 기나긴 투쟁이 내게도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그래서 함께 울었다.
짙고 짙은 어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이 짙은 만큼 적막이 깊을 뿐이었다. 그러나 산줄기만은 어둠 속에서도 그 윤곽을 어렴풋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어렴풋한 윤곽 속에서도 산줄기는 장중한 무게와 굳센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억센 산줄기의 봉우리 봉우리에서 봉화들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봉화들은 너울너울 불길을 일으켜 어둠을 사르며 줄기줄기 뻗어나간 산줄기들을 따라 끝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불꽃들과 함께 함성이 울려오고 있었다. 그는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봉홧불이 타올라 산줄기를 따라 불꽃행렬을 이루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봉홧불들의 기세를 따라 다같이 함성을 지르며 투쟁의 대열을 지었던 때도 분명 있었다. 그는 가슴을 펴며 숨을 들이켰다. 그와 함께 밤하늘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그는 문득 숨을 멈추었다. 그는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본 것은 넓게 펼쳐진 광대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수없이 빛나고 있는 별들이었다. 그는 멀고 깊은 어둠 저편에서 명멸하고 있는 무수하게 많은 별들을 우러러보았다. 가을별들이라서 그 초롱초롱함과 맑은 반짝거림이 유난스러웠다. 그 살아서 숨쉬고 있는 별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별들이 모두 대원들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먼저 떠나간 대원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혁명의 별이 되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한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민중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쓰러지고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고, 죽어도 뜨거운 피 속에서 다시 불길로 일어난다.
그들은 다시 산으로 우뚝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태백산맥처럼 커다란 산맥을 이룰 것이다.
마침내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머리 위에 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