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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책

나치의 아이들

한 배우의 조상 중에 친일파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나 나름대로도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다가, '외증조부'라는 먼 관계로 이어진 후손에게까지도 낙인이 이러한데 그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러 영화나 책들을 보면서 범죄자 당사자보다 그의 가까운 이들에게로 시선이 돌려질 때도 있었고.

그렇기에 우연히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보게 되었을 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치의 아이들>은 나치 독일(제3라이히) 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던 자들, 그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당연히 나치 독일 하에서는 그 권력에 힘입어 누구보다도 호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가족들.

그러나 독일의 패전, 그리고 나치 독일을 이끈 주역들이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이나 자살로 불명예스러운 끝을 맞는다면?


8명의 나치와 그 가족들이 소개되는데,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나 아버지와의 관계의 심도가 아이들의 길을 결정하는 듯 보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대개 역사를 부정하고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믿는 행보를 보였다. 반면 아버지와 연결 고리가 희미하거나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조차 증오스러워하기도 했고.

이런 행보는 세대가 멀어질수록 뚜렷해져서 나치들의 손자쯤으로 가면  더욱 자신의 조상을 증오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직접적으로 나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 객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겠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들은 좀 특이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와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같은 이름을 쓰면서도 굳이 자신의 아버지를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알베르트 슈페어 자체가 사형을 면한 특이한 케이스라 가능했던 것 같기도...


어쨌든, 역시 흥미로운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아이들 쪽이다.

힘러의 딸은 '공주님'으로 남아 네오나치를 지지하기도 하며, 괴링의 딸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인다.

이들은 주로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이며, 모든 잘못은 히틀러에게 뒤집어 씌운다. 조금은 인지부조화적인 면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치 조직 하에서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이들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누구보다도 사랑이 넘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밖에서 한 짓을 아이들은 결코 믿을 수 없을만큼.

회스였던 것 같은데, 전범재판을 받으며 자신은 그저 조직의 일부였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유대인 학살을 행할 수 있었다는 뉘앙스로 말했던 게. 그 대목을 읽으며 다시금 소름이 끼쳤다.

인간을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가. 혹은 스스로 생각 없는 부품이 되어버리는 인간이.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이면에 냉혹한 살인기계가 공존할 수도 있는 그 복합성이.


그러니 아버지의 따스한 모습과 사랑만을 받아오던 아이들이 역사 속에 쓰여진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만행을 받아들이기는 당연히 쉽지 않을 것 같다.

또한 이 아이들은 당연하게, 그리고 풍족하게 누려오던 것들을 한순간에 빼앗기고 생각지도 못했던 거친 삶 속으로 내몰렸으니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런 면을 보고 '아이들은 피해자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관점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부당하게 취한 이득을 빼앗는 것을 가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므로.

물론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와 나치라는 조직 하의 냉혹한 부품이라는 병치하기 어려운 모습 사이에서 과연 무엇을 택해야 할지 갈등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건 당연하겠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했을수록 역사를 대면하여 아버지의 죄악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일 게 분명하다.


사실 책의 부제는 '전범의 자식들, 역사와 대면하다' 였는데, 나는 역사와 정말 대면한 아이들은 몇 안 된다고 여겼다.

대부분은 오히려 역사를 외면하고 기억 속에 있는 멋진 아버지만을 붙잡고 늘어졌지.

비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역사를 부정하고 오히려 네오나치나 전범에 동조하는 이들의 모습은 씁쓸했다.


책을 읽을수록,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책 속 나치의 아이들은 적어도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모두 빼앗겼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사는 게 현실 아닌가.

친일파의 대명사인 이완용의 후손들이 소송까지 걸어가며 환수당한 재산마저 버젓이 가져가는 세상인데.

나치의 아이들은 가난으로 내몰리며 역사를 혹은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하기라도 했지, 우리나라 친일파의 후손들은 오히려 조상에게 고마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처음의 그 배우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를 포함한 모든 친일파의 후손들은 자신이 누려온 풍족한 삶이 부당하게 취해진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 국가에, 사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의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을 되풀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의 기록과 교육을 통해 그것을 잊지 않게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이미 첫 단추부터 글러먹었고 바로잡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적어도 교육을 통해 아픈 역사가 오래오래 기억되고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부끄러움으로 남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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