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봤다.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애니그마를 해석하기 위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이야기라고 해서 엄청난 두뇌 싸움을 볼 수 있는건가..! 해서 봤는데 결국 남는 건 앨런 튜링이라는 인물의 고독감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음.
초장에는 베니의 앨런 튜링을 보면서 옼 셜록같앸ㅋㅋㅋㅋㅋ 하고 봄. '사회성이 부족한 천재'라는 캐릭터가 닮아있다.
근데 굳이 나누자면 셜록은 자기가 주위를 왕따시키는 타입이고, 이미테이션 게임의 앨런 튜링은 어울리고는 싶지만 왕따를 당하는 타입.
영화 중 앨런 튜링이 암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사랑한 친구 크리스토퍼 때문이었다.
암호는 비밀이 아니고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크리스토퍼의 설명에, 소년 앨런은 말한다.
사람들의 말과 같다고. 사람들은 늘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감춰두고 돌려서 말하지 않느냐고.
그런 앨런에게 크리스토퍼는 네가 암호에 소질이 있을 것 같다며 읽던 책을 빌려주고, 둘은 둘만의 암호를 만들어 쪽지를 나누게 된다.
어른이 되어도 앨런은 여전히 사람들의 말이라는 암호를 풀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린 점심 먹으러 갈 거야"라는 동료의 말을 "함께 점심 먹으러 갈래?"로 해석할 수 없었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그걸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만큼 어려운 건 없구나 싶었다.
영화는 여러 차별을 보여준다.
먼저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클라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
처음 암호 풀이 시험 때, 늦은 그녀를 보고 시험관(?)은 '이곳에 여성이 참여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비서 면접은 위층이고, 퀴즈는 정말 누군가 풀어준 것이 아니라 당신이 푼 것이 맞냐고.
하지만 그녀는 앨런마저 8분이 걸리는 크로스워드를 6분도 안 돼 푸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남성들만 있는 곳이라 일하러 보낼 수 없다거나, 나이가 25인데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그만두고 결혼을 준비하라는 부모님의 명령 같은 것들.
한편 앨런 튜링은 두 가지 이유로 차별받는다.
첫번째는 그가 너무 똑똑하다는 것. (사회성이 없다는 것까지 더해져 더 심하게 따돌림을 당하기는 하지만)
두번째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
첫번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나 적대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두 번째는 경악스러웠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국가에서 법으로 규제를 할 수 있는 '죄'이며, 화학적 거세라는 방법까지 취할 수 있는 사안이며, 오죽했으면 한 국가의 이중첩자라는 비밀과 맞먹을만큼 큰 비밀이 되어야 하다니!
어쨌든 이렇게 차별을 받아 온 사람들이니 서로의 처지를 알고 서로를 걱정해주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셜록에게 왓슨이 있다면, 앨런에게는 클라크가 있었다.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법을 알려준 이들.
그렇게 결혼을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앨런 곁에는 아무도 없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는 사회에 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다가와 준 사람이 크리스토퍼였다. 늘 붙어다니던 둘. 쪽지로 대화를 하던 둘.
개학 후, 앨런은 사랑한다는 말을 둘만의 암호로 쓴 쪽지를 들고 크리스토퍼를 기다리지만 크리스토퍼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앨런을 부르고, 크리스토퍼와 친했냐고 묻는다. 앨런은 극구 부인한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누가 알까봐, 크리스토퍼를 좋아하는 마음이 보였을까봐 그런 것일까?
그런 그에게 교장은 크리스토퍼가 죽었다고 한다. 결핵으로 시한부 선고를 이미 받았었다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반복하던 앨런은 그와 별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는 말을 다시 한다.
첫사랑의 상실, 가장 친하다고 믿었으나 정작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는 또 다른 상실감이 어린 앨런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
그렇게 크리스토퍼는 떠나고, 아마 앨런의 곁에는 그 누구도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셈이다.
앨런은 애니그마 해독기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인다.
전쟁이 끝나고, 앨런과 팀이 연합군을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은 불 속으로 사라진다.
남은 건 크리스토퍼뿐이다. 기계 크리스토퍼, 그리고 크리스토퍼의 기억.
앨런은 자신을 찾아온 경찰관에게 묻는다. 자신은 기계인지, 사람인지.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부른다.
그는 연합군을 위해, 전쟁의 승리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이용만 당한 것처럼.
그는 홀로 되는 게 지독히도 두려운, 그저 사람일뿐인데.
외로움이 싫어서 기계 크리스토퍼 곁이나마 떠나지 않으려고 가혹한 화학적 거세를 견뎌야하는, 나약한 사람일 뿐인데.
그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도록 만든 건 누구일까.
또 하나 생각이 깊어지게 했던 부분이, 처음 애니그마를 해독하고 보급선을 파괴하려는 유보트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이다.
이때 피터는 그 보급함에 자신의 형이 타고 있으니 이번 한번만 유보트를 공격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모두는 애니그마의 해독은 전쟁의 승리를 위함이니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인 것이다.
이 주제가 나오면 나는 항상 '퇴마록'을 떠올린다.
퇴마사들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은 죽도록 괴롭더라도 그 누구도 희생되지 않는 길을 택하려 한다. 심지어는 희생해야 하는 자가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피터 역시 자신의 형이 아니었다면 그 배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의 일이니까.
전쟁에 이김으로써 구할 수 있는 만사천 명의 목숨에 비하면 보급함에 타고 있는 500명의 목숨은 작은 것이니까 괜찮아, 라는 단순한 수학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500명 안에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속할 때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 베니의 초췌한 얼굴, 40여 년을 억눌러왔을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터져나오는 장면의 그 눈빛은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