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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영화

빌리 엘리어트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형의 레코드를 틀어놓고 춤을 추던 탄광촌의 열한 살 소년.

권투에는 젬병이지만 남자는 권투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권투 수업에 다니던 그는 우연히 권투 교실 한켠에서 열린 발레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발레가 좋아.

하지만 발레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투 수업을 듣는 척하며 몰래 발레 수업을 들어야 했던 빌리.

발레를 공부한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고는 갈등이 생기지만, 결국은 국립발레학교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발레에 대한 소년의 순수한 열정, 그리고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

그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내 마음을 울린 것은 그 소년을 지지하기 위한 가족의 희생이었다.


가족의 상황은 불우하다. 탄광촌의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파업중이니 돈 나올 구멍이 없고, 어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치매끼가 있고.

그러나 크리스마스 날 빌리의 춤을 본 아버지는 이 아이가 천재일지도 모르니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배신자'가 되어 탄광에 일을 하러 가게 된다. 그가 '배신자'라 부르며 조롱했던 이들의 쏟아지는 멸시를 받으며.

자신을 말리는 빌리의 형 토니에게 빌리가 천재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고 절규하는 아버지.

그 부정이 눈물겨웠다.

어쩌면 빌리에게 '남자다운 것'을 강요하던 것도, 아버지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삶의 방향이기 때문에 그랬을 거란 생각도 들었고.

아들에게 최선의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 자신은 이 탄광촌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좁은, 그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들이 살아온 그 길만을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 아들도 그 길을 가면 행복하게, 적어도 평범하게는 살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을 거고.

그런 아버지에게 빌리의 춤은, 빌리가 온 몸으로 행복하다고 외치는 듯한 그 춤은 자신의 좁은 세계가 깨지는 듯한 충격 아니었을까.

전당포에 죽은 아내의 패물을 저당 잡히는 것도, 파업이 끝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비좁은 승강기에 몸을 욱여넣고 다시 탄광으로 내려가는 것도, 모두 빌리가 구름 위로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현실의 일면이었다.


백조는 호수 위에 우아하게 떠 있지만 사실 호수 아래서는 발을 열심히 젓는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빌리와 가족들을 보면서, 이 가족은 어쩌면 백조가 우아하게 떠 있을 수 있게 받쳐주는 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빌리는 조그만 탄광촌의 '남녀의 역할'에 대한 벽을 깨부수고 탄광촌을 벗어나 런던이라는 대도시로 유학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

아주 잠깐이지만 역시 시골 마을의 보수적인 성정체성을 깨뜨릴 듯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빌리의 친구 마이클이다.

신기하게도 빌리와 마이클은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한 듯하다.

빌리에게는 발레, 마이클에게는 동성애 성향.

마이클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자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릴 적 찾은 정체성이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빌리를 찾아 온 그의 곁에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을 보면.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하나 둘 그곳의 벽을 부수었다면.


여담이지만 성인 마이클 역이 아역 마이클과 눈이 정말 많이 닮아서, 동일 인물이 다 성장하고 영화를 찍은 건가... 하는 착각을 잠시 했다.





또 이 영화의 인상깊었던 점은 음악이다.

그 시대의 - 70년대인지 80년대인지 어쨌든 - 음악인 듯한 것들이 내내 흘러나오면서 그 시대에 흠뻑 취하게 되는 것.


"좀 평범하게 걸을 순 없니?" 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말처럼, 춤을 알게 되고 걸어가며 내내 춤을 추는 빌리의 모습과, 그때의 향수 어린 음악들.

그 자유로운 모습들에 나까지 행복해졌던 것 같다.


이 영화는 메가박스의 '심리학 읽는 영화관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다.

강의 주제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고.

정체성의 유형에는 네 가지가 있었는데... 음 기억이 잘 안나는군...

어쨌든 빌리는 정체성을 성취한 케이스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체성을 성취한 사람들은 불행하게 하는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 좀 충격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체성 유예 단계라고 생각하고, 얼른 그걸 성취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춤을 출 때 몸에 불이 붙은 것 같다던, 날아오르는 것 같다던, 전기 같다던 빌리는 내내 행복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학교에 입학한 때부터 무대에 백조로 서는 14년동안,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춤이 짐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성인이 된 빌리가 한 마리 백조가 되어 뛰어오르던 그 때, 우리는 그처럼 큰 감동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략된 그 모든 빌리의 삶의 장면들을 짐작하고 있으니까. 어린 아이의 순수한 열정이 이러한 모습으로 구체화 되는 역사, 간단히 말하면 '성장'을 내내 지켜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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