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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책

우아한 가난의 시대

 소확행, 시발비용, 탕진잼, 욜로... 소비와 관련된 이같은 신조어들은 계속해서 쏟아져나오고 있고, 아마 그건 소비 행태가 트렌드와 뗄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냥 길을 걷다가도 멋지게 우뚝 솟아오른 아파트를 보고 '생전에 서울에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까' 하기 일쑤다. 그러고보니 오늘도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다 눈앞의 아파트를 보고 '저 아파트 한 채만 있었으면 좋겠다' 했고, 그래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더 무거워졌다. '로또에 당첨되자'라거나 '중국 재벌과 결혼하자' 따위의 현실감 없는 농담은 현실만 더 무겁게 한다. 그렇게 가기 싫은 사무실로 돌아가 수십 년을 일만 한다 해도 아마 회사 옆 아파트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삶은 진짜 꿈 속에서나 있을 것이다. 대신 나는 내 손에 당장 들어오는 아주 작은 것들에 돈을 쓰고 잠깐의 기쁨을 얻는다. 아주 예쁜 컵이라든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식탁보 같은 것들. 누군가 그랬다. 돈으로 행복은 살 수 있다고,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행복을 살 만큼 많지 않아 나는 겨우 기쁨 정도나 살 수 있는 거라고. 아마 근면성실과 저축을 통해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있던 세대에는 지금의 기쁨을 참고 큰 행복을 얻는 게 당연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기쁨을 참는다고 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때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탕진'을 해버리고 '소소한' 행복을 좇는 걸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소비를 비롯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현상들이 다양하게 드러나 있다. '가성비'를 추구하는 사람과 맞춤 수트 한 벌에 월급을 상회하는 돈을 쓰는 사람이, 소셜 네트워크 중독과 자신만의 동굴이, 맥시멀리스트와 효율성을 추구하며 유니폼만 입는 개념이 공존한다.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한 알에 억 단위가 붙는 보석의 사진을 찍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단 부분에서 말하는 것은 품종도 다양한 과일들이다. 가난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작고 반짝이는 것들'은 고작해야 과일 정도라는 듯.

 우리는 많은 것을 낭비하고 있다. 돈이든 시간이든 감정이든. 한편으로 그것은 때로 우아한데,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타인의 눈이나 시류 같은 것에 휩쓸려 낭비하게 되는 것은 꽤 천박한 낭비가 되기 쉬울 것이다.

 잠시 가난을 망각하고 우아함에 젖어들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우아함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당장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극도의 시간빈곤자가 되는 저자의 이야기가 책에 등장하고. 나는 당장 십 년 후에 무얼 하고 살고 있을지 막막하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나 자신만의 럭셔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도 어딘가 쓸쓸해진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가난을 방만하게 말했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글에 부끄러워져 한동안 동면을 취했다고 했다. 물론 작가가 말하는 '가난'은 당장의 생존을 위협받을 만큼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정도와 면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 빈곤감은 지금을 살아가는 세대가 공통적으로 분명 느끼고 있는 것이므로. 그리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할 수 없듯, 가난한 세대에 가난하게 살아가기만을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우아함은 필요하다. 

 

돈뿐 아니라 시간을, 감정을, 그러니까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애썼다. 망각은 편안하고 달콤한 반면에 자각은 불편하고 괴롭다. 그러나 내가 지금 삶을 아껴 두는 대신 써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삶을 낭비하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지만, 젊음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낭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자각이 필요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10p.)
 그리하여 나는 이제 가성비라는 단어를 절반쯤만 믿으려 한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나머지 절반쯤은 욕망과 우연을 위해 남겨놓고 싶다. 며칠 후면 시들어 버릴 생화를 주기적으로 구입하고, 이왕 여행을 떠난다면 하루쯤은 비싸더라도 아름다운 숙소에서 자 보고, 인터넷으로 대량 주문하는 것이 저렴하다 해도 가끔은 오프라인의 상점들을 서성이는 것. 성공과 실패의 경험치를 늘리는 것.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편이 더 가성비 좋은 선택이다. (62p.)
멋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알아보는 안목에서 나온다. 무뚝뚝한 말투에서도 묻어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간결한 매너에서 나온다. 지나치게 가볍거나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게, 모든 상황을 세련되게 중화시킬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실컷 사 본 경험에서 나올 수도 있다. 무엇보다 세상과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혼자 보내 본 시간들에서 나온다. (119p.)
가난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과 육아를 포기할 수 없는 시간 빈곤자가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운동을 포기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는 시간을 포기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동시에 최악의 선택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포기한 후에 남은 시간의 질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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