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처음 읽은 게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뭔가 감명을 받았어서 이번에 다시 읽어보았다.
근데 처음 느낀 감상이 '올드하다'였다.
시대적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기도 하지만,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라든가.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꼭 예쁜 여자애 옆에 못생긴 여자애가 있고, 그 애 때문에 일이 그르쳐진다든지, 지하철을 내려가다 고개를 숙였는데 앞에 있는 여자가 몹시 째려보았고 그 여자가 너무 못생겨서 더 억울했다든지.
근데 이건 내가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최근 민감해지려 노력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인간 중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 없고 다들 굉장히 희화화되어 있거든.
어떻게 보면 작가가 그만큼 시니컬한 시각으로 글을 쓴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자 작가가 남성의 시각으로 써낸 글인데, 글에서 묘사되는 남자들의 세계에 남자들은 어느정도 공감할까 궁금하기도.
딱히 스토리랄 건 없는데, 고교시절 아무 이유 없이 엮인 네 명의 인생이 어떻게 함께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게 주된 스토리다.
우리들은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마음 깊이 믿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서로의 인생이 얽혀버렸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하찮은 인연이 끝까지 따라다니며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인생을 잠식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연한 순간의 일이 그 사람 인생의 한 상징이 되어버리는 일도 적지 않다. 드렁칡이 된 사연부터가 그렇듯이 우리의 인생은 죽죽 뻗어가기보다는 그럭저럭 꼬여들었다.
(중략)
그러는 동안 우리 모두 공평하게 사십을 넘겼다. 만수산 드렁칡,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을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만은 좀 다른 것이리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17p.)
인물들은 몹시 희화화되어 있고, 보는 내내 '으이구! 한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데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장들이 참 명문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53p.)
이들 넷은 '마이너'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나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마이너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아무런 목표도 노력도 없이 흘러가는대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승주는 얼굴과 엄마와 누나만 믿고 말 그대로 대충. 화자인 형준은 그저 보이는 모습에만 치중하며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조국은 야망은 있으나 그저 남들 하라는대로, 혹은 좋아보이는 것에 무대뽀 돌진.
두환만은 조금 달랐다. 가진 건 주먹밖에 없으나 18동인을 만들거나 소희를 쟁취하거나 하는 추진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환이 나타날 때마다 나머지 셋의 삶의 방향이 휙휙 바뀌어버린 것은.
그렇다고 마이너의 삶을 사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또한 저들이 발버둥친다고 해서 메이저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 역시 마이너리거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거 생각하면 사는 것도 정말 별 거 아니야. 말하자면 내가 세월과 함께 닳아가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돼. 산에 한번 가봐. 전나무숲, 대나무숲, 소나무숲, 이름은 그렇게 붙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전나무 대나무 소나무 입장에서만 본 거지. 사실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것은 이끼 같은 거, 그리고 드렁칡 같은 하찮은 식물이더라고. (241p.)
다만 내가 마이너리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쁘게 살면 되는 것이다.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고.
드렁칡 4인방을 '으이구! 한심!' 하고 보게 된 이유는, 이들은 마이너리거이면서도 서로 안에서는 자신이 메이저리거인양 느끼면서, 그렇게 자기를 기만하면서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특히 형준이 그렇다. 그는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보이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한다.
그렇게 겉으로만 보여지는 삶이, 그리고 하루하루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인생이 안타까운 것이다.
하긴,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내가 마이너리거임을 인정하면서 드렁칡 4인방 같은 이들을 또다시 마이너 속의 마이너로 굳이 분류하려 하는 것 같아서.
책을 덮으면서 이들을 한심하게 여기다가도 문득, 내가 바로 남을 낮추어보는 형준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봉분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환의 죽음이 아니라 내가 끌고 가는 삶의 시간이 불현듯 뻣센 가시처럼 목구멍을 깊숙이 찔러왔다. (243p.)
어쨌든, 나는 언젠가 내가 보내온 삶의 시간이 뒤늦게 뻣센 가시처럼 나의 목구멍을 찔러오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부드럽게 살아가야겠다.